[노년의 향기] 예순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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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향기] 예순찬가      
  • 서옥희 시민기자
  • 송고시각 2020.12.28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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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같은 내 나이 예순 앞에서….
나이가 든다는 건 아쉽지만 나에겐 즐거운 일이다. 조금 더 넓어지고 따뜻해지고, 열려간다. 예순이 되어 보기 전에 맛 볼 수 없었던 즐거움이다. 참 기쁨이 무언지 알게 되었다. 소소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몇 해 전부터 김장철이 가까워지면 난 바빠진다. 나의 또 하나 겨울 준비다. 가을걷이 하는 밭에서 무공해 무청을 한 아름 구해온다. 무청을 삶아 된장에 적당히 버무려 여러 덩어리로 나누어 냉동실에 보관한다. 비교적 따뜻한 부산에서 아주 두꺼운 털 코트를 찾을 때가 가끔 있다. 바로 그런 날 아침부터 내 손길은 분주해진다. 
시래기 한 덩이를 꺼낸다. 멸치 다시 국물을 푹 우려내고, 쌀뜨물을 받고, 들깨가루 조금 넣어 시래기국을 한 솥 가득 끓인다.(맛나게 끓이는 최고의 Tip! 사랑 한 스푼 넣기!) 살고 있는 국민 임대 아파트 좁은 집에 친구들을 불러 모은다. 시래기국에 김장 김치 한 가지와 수다를 특별 반찬으로 삼아 함께 밥을 먹는다. 언젠가부터 시래기국 단골손님이 줄을 선다. 소박한 밥상에서 누리는 이 기쁨. 명품 시래기국이 더 이상 소문나면 안 되는데ㅎㅎㅎ. 내리 작은 마을에 「내리카페」로 불리는 우리 집엔 쉼과 기쁨이 가득하다.

젊은 날엔 나의 모남, 가난함, 약함, 어리석음들을 밀폐 수납공간 구석구석에 숨겨 놓았었다. 감추고 가리고, 덮고…. 예순을 넘으면서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줄 용기가 생겼다. 내 안에 있는 아픔과 실수도 내어 놓는다. 
“나, 20% 모자라!” 
약함부터 쏟아놓으며 한 번 빙긋 웃기도 한다. 평생 시행착오를 거듭했지만 지금도 먼지 냄새 풀풀 날리며 살고 있어도 누구에게나 친구가 된다. 
한번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 꽁꽁 싸매두었던 보따리를 풀기가 더 쉬운가보다. 비밀이 담긴 이야기 상자들을 망설임 없이 열어 보여준다. 삶의 방향보다 달리기에만 바빴던 나와 그들의 삶. 남편과의 갈등으로 이혼한 사연, 자녀를 먼저 보낸 가슴 아픈 이야기. 실수들…. 모두 끄집어낸다. 예순을 넘은 푼수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어느 날 해거름 시내를 지날 때다. 신호에 걸려 버스가 잠시 섰다. 버스 안에서 늙수그레한 경상도 사나이가 지나가는 누군가를 큰 소리로 부른다. “어이, 어! 이 문디자슥아!….” 몇 번 고함을 치자 길 가던 사내가 멈춘다. 
가던 길에서 뒤돌아 와 차창 밖으로 내민 손을 잡는다. 힘줄이 툭 튀어 나오고 소나무 옹이처럼 투박한 두 남자의 손이 잠시 포개진다. 둘 다 허름한 작업복 차림이다. 담배를 얼마나 피워댔는지 누런 치아가 삶의 고단함을 말해준다. 염색된 그 이를 다 드러낸 두 얼굴에는 피로도 어디로 날아갔는지 환한 미소가 가득하다. 예순을 넘은 나의 렌즈에 포착된 그 날 그 아름다운 광경은 나의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요즘 책 읽기 재미에 폭 빠졌다. 전에도 책을 그리 멀리 두지는 않았다. 20, 30대에 느낄 수 없었던 예순을 넘으면서 깊은 맛을 음미해본다. 아직도 가야 할 길 앞에서 통찰을 통해 재구성해본다. 젊을 때의 책읽기, 글쓰기는 내면 성숙보다 지식 탐구와 성공이 목표였다. 대충 읽고 총총 지나갔다. 새삼 여러 분야의 책을 읽으며 새로운 맛을 본다. ‘아 이런 세계관을 가졌어야 했는데, 이렇게 살았어야 했는데. 내가 잘못 살았구나! 그래, 그래, 아하! 그렇구나!’ 넋 나간 사람처럼 혼잣말로 추임새를 넣는다.
나도 내 삶의 길목에 웅크리고 있는 아직도 울렁대는 가슴이 말하는 진솔한 글을 쓰고 싶다. 거친 경상도 사나이의 밝은 미소 같은, 시래기 국 같은 소박한 내 삶을 글로 옳기고 싶다. 지난한 삶에 켜켜이 쌓인 투박한 손등 같은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 예순을 넘은 대한민국 대표작가 한비야. 그녀는 길을 넓혀가고, 따뜻한 시선으로 함께함의 소중함을 말한다. 그녀는 배움을 멈추지 않고 꿈꾸고, 노래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나도 예순을 노래하며 망설임 없이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리. 달려오는 모든 세대를 큰 팔 벌려 맞으며 봄날 같은 내 나이 예순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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