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유림의 활동 12] 機張文廟慕聖稧(기장문묘모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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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유림의 활동 12] 機張文廟慕聖稧(기장문묘모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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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고시각 2020.06.03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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機張文廟慕聖稧는 機張鄕校 儒林(기장향교 유림)을 中心(중심)으로 文廟와 校宮(문묘와 교궁)을 守護(수호) 하고 儒林들의 團合(단합)을 꾀하기 위하여 組織(조직) 된 모임.
[우리 기장모성계에서는 계를 계(稧=栔)로 씀]
機張文廟慕聖稧는 栔를 組織(계를 조직)하고 지금까지 길게는 4代에 걸쳐 契員(계원=회원)으로 參與(참여)하며 이어가고 있다.
機張文廟慕聖稧는 機張鄕校의 春秋釋奠 獻誠(춘추석전 헌성)으로 先代(선대)의 뜻을 따르고 있으며 西紀 二千0六年度(서기2006년도) 모성계원은  一百二十一名(121명)으로 構成(구성)되었다.
 慕聖栔案에(모성계안) 따른 組織과 背景(조직과 배경), 結成된 事由와 始點(구성된 사유와 시점) 등(等)은 機張鄕校誌를 參考(기장향교지 참고)한다.
 
◎慕聖栔案(모성계안)
대저 세상이력(觀夫世之)을 볼 때 契(계)란 것은 古今( 고금)에 하나같지 않고 각 그 뜻에 따라서 이와 같은 名稱(명칭)이 眞實(진실)로 많음이라 오직 우리 慕聖栔 (모성계)는 만세지성(萬世至聖)이신 孔夫子(공부자)를 숭모( 崇慕)하는 것이 義意(의의)이니라.
우리 東邦(동방)은 좁고 적으나 백성이 살아가면서 하늘 을 우러러보며 箕子 八條(기자팔조)의 거룩한 가르침으 로써 人文(인문)은 겨우 열려있고, 옛 高麗末(고려말)에 구재(九齋) 최충(崔沖)先生, 회헌( 晦軒) 안향선생(安珦 =安裕先生)이 서로 이어서 창작하신 성인의 학문이 미치고 또 우리의 성스러운 朝廷(조정) 의 밝은 治敎(치교 )로 하여 어진 선비를 배출 하여 학술 이 盛(성)하고 禮樂(예 악)이 아름다워 가히 漢나라와 唐 나라(한당시대)를 능가하고 공자님의 魯(노)나라와 맹자의 鄒(추)나라 같이되기를 바랐으나, 세상이 末世(말세)가 되어 유교의 위상이 땅에 떨어져서 邪敎(사교)의 設(설)로 하여 眞否(진부 )가 소란 하게 뒤섞여 성학의 번성함과 도덕의 길이 막힘으로 유교의 쇠퇴함이 극에 도달했으니 고을의 선비들이 다 같이 심상치 않게 여기고 성인께서 창업하신 뜻이 추락됨이 없도록 의논을 모아서 창설하신 이 계로 하여금 학문을 지기하는 것이 바른 일이며 선비의 자랑이므로 힘써 행동으로 儒風을 崇尙하고 振作(유풍을 숭상하고 진작)하며 배 움을 군자의 근본을 삼고 三公(삼공)의 도를 講論(강론) 하는 일을 어찌하여 나 혼자만의 專有物(전유물)로 하겠는가.
유교는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리는 학문이기에 유교의 성함은 도덕의 성함이니 이 계의 흥망의 열쇠는 계의 결과가중요하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이미 계 조직을 결의하고 나에게 契序(계서)를 맡기니 나는 학문과 더불어 식견도 부 족하여 불감당이라서 사양하였으나 거둬지지 않음으로 나도 배움을 원하는 바 이고 또 공자님의 학문이기에 거절 할 수 없어 분수에 넘치나 그 대강을 간략하게 서술하여 보임으로써 후세사람이 그 뜻을 따르도록 함이라.
 
檀紀 四二八一年(一九四八) 戊子四月上旬  
金海 金璡性 謹序(당사리 출신) 

단기4281년(1948) 무자4월상순
김해 김진성 근서(당사리 출신)

戊辰(一九二八)四月十六日 機張文廟聖栔案
(慕聖栔 原案에 依據 戊子年에 다시씀)

무진(1928)4월16일 기장문묘모성계안
(모성계 원안에 의거 무자년에 다시 씀)

一九九九년 十二月 性坡 國譯
 1999년 12월 성파 국역

◎慕聖栔組織과 背景(모성계조직과 배경)
우리나라의 儒敎(유교)는 曰帝 三六年(일제36년 )을 거 치면서 鄕校(향교)는 官廳(관청)의 엄격한 統制(통제)를 받게 됨으로써 享祀費(향사비)의 조달(調達)과 소작료징 수(小作料徵收) 소작자(小作者)의 變更(변경) 등에 까지 지방관서(地方官暑)의 지시감독(指示監督)을 받게 되고 마침내 自律權(자율권)마저 喪失(상실)하였다. 
또한 鄕校財産(향교재산)에 대한 侵奪政策(침탈정책) 으로 鄕校所有(향교소유)의 林野田畓(임야전답) 등의 不動産(부동산)이 相當數 減少(상당수감소) 되어 가는 데 또 弄奸輩(농간배)의 장난으로 倒産直前(도산직전)에 이르렀고 더욱 親日宥和政策(친일유화정책)에 이용되어 儒林이 懷柔工作(회유공작)내지 破壤의 對象(파양의 대 상)이 되면서 眞實(진실)한 儒林(유림)이 鄕校(향교)를 外面(외면)할 地境(지경)에 이르러 鄕校에서는 享祀, 祭需(향사, 제수)의 마련은 물론이요, 建物修繕(건물수선 )의 財源(재원)마저 窮乏(궁핍)하게 되어 뜻있는 儒林 들이 儒敎의 衰退(쇠퇴)함을 慨歎(개탄)하 고 儒道復興(유교부흥)을 圖謀(도모)하는 方案(방안) 으로 地方 (지방)마다 契(계)를 組織(조직)해서 鄕校施設管理(향교시설관리)와 儒道守護(유도수호)를 위하여 全國的으로 構成된 것이 慕聖栔(모성계) 또는 慕聖會( 모성회) 같은 類似한 名稱(유사한 명칭)으로 出發(출발) 하게 되었다.
이 擧國的인 儒林運動(이 거국적인 유림운동)은 日帝下 (일제하)에 儒林을 改編(유림을 개편)하는 場外地下組織(89장외지하조직)의 性格(성격)으로 등장하여 儒敎存續의 契機(유교존재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러하던 이 慕聖組織(모성조직)이 光復半世紀(광복반 세기)동안 國家發展(국가발전)에  따른 與件變化(여건변 화)로 인하여 現在(현재)는 文化遺産保存(문화유산 보존 )을 國家(국가)에서 施行(시행)하니 存在理由(존재이유) 가 微弱(미약)해짐에 따라 이제는 거의 解散(해산)되고 全國(전국)에 손꼽을 정도가 남아 있는 실정이다.
우리 機張의 모성계는 一九二八年 戊辰(1928년 무진) 에 結成(결성)되어 많은 先賢(선현)들이 經營管理(경영 관리)를 잘해온 結果(결과)로 設立目的趣旨(설립목적취 지)에 따라 財産管理(재산관리)가 잘되어서 釋奠享祀(석 전향사)와 鄕校運營(향교운영)에도 응분(應分)의 協助( 협조)를 하고 있다.
시대가 변천하여 東洋(동양)의 美風良俗(미풍양속)이 褪色(퇴색)되어가는 이 때 모성계의 이러한 活動(활동)은 천만다행으로 생각되며 앞으로 선현님의 創立精神(창립 정신)을 길이 이어 받아 儒敎振興에 寄與(유교진흥에 기 여)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別紙(별지)와 같이 모성계 創立 略史(창립약사)를 影印(영인)하여 그 업적을 千秋(천 추)에 기리기 위함이라.
 
西紀二00五年 十二月 機張鄕校 典校 李秀浩
서기2005년 12월 기장향교 전교 이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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