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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부산거주 이상민 씨 태실유물 2점 포함 총 24점 부산박물관에 기증
[스토리] 부산시민 품으로 온 세종대왕 왕자 태실유물...
2021. 07. 06 by 김항룡 기자

명나라 선덕 3년(세종10년, 1428) 
무신 10월 27일 묘시생으로 
의창군 공의 태이다. 
정통 3년(세종20년, 1438) 무오 3월 11일에 묻었다.  
-세종대왕의 왕자 의창군 태지석 내용

 

출처:부산박물관

<기장일보/김항룡 기자>=세종대왕의 왕자 의창군의 '태지석'의 존재가 확인됐다. 일부 글자는 마모되어 정확한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7월 6일 부산박물관은 부산에 거주하는 이상민 씨로부터 조선 세종대왕의 태실 유물 2점을 비롯한 총 24점의 유물을 기증받았다고 밝혔다. 

'세종의 왕자 의창군(義昌君) 태지석(胎誌石)'과 '세종의 왕자 안태용(安胎用) 분청사기(粉靑沙器)'가 그것.

참고로 태실(胎室)은 왕실에서 왕자나 공주 등 왕손이 태어나면 땅의 기운이 좋은 곳을 정해 태(胎)를 묻었던 공간이다.

'세종의 왕자 의창군 태지석'의 명문 내용을 살펴보면 "의창군은 1428년 10월 27일 묘시생(卯時生)으로 1438년 3월 11일에 태를 묻은 것"으로 확인되는데, 부산박물관 관계자는 "경북 성주 선석산 의창군 태실 비석(아기비)의 명문 중 태를 묻은 일자가 일치한다는 것을 이번에 기증받은 유물을 통해 확인했다"고 밝혔다.

부산 거주 이상민 씨가 부산박물관에 기증한 세종대왕의 왕자 의창군의 태지석(위)과 탁본(아래) 모습. 출처:부산박물관

부산박물관에 따르면 의창군은 세종의 왕자 중 1438년 3월 10일 가장 먼저 태실을 조성한 세조에 이어 두 번째로 경북 성주 선석산에 태를 묻었다. 세조와 의창군을 제외한 나머지 왕자들은 1439년 이후에야 태실을 조성했다. 현재 18명의 왕자 중 4명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는 상태다. 

또 다른 유물은 '세종의 왕자 안태용(安胎用) 분청사기'는 꼭지가 달린 반구형 뚜껑 모양의 분청사기로, 태항아리 전체를 덮는 용도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러 근거로 인해 세종대왕의 왕자인 의창군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고증이 필요한 상황이다.
 
송의정 부산박물관 관장은 “15세기 조선 전기 장태문화(藏胎文化)를 알 수 있고 특히 세종의 왕자 태실에서만 확인되는 특정한 시기, 장소 및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서, “향후 유물의 보존처리를 진행하고 기존 연구성과 검토 및 비교 연구를 거친 후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태항아리 전체를 젚는 용도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분청사기' 모습. 의창군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고증이 필요한 상황이다. 출처:부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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