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옥의 시간여행] 영도대교 그 추억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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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옥의 시간여행] 영도대교 그 추억속으로...
  • 김연옥 기자
  • 송고시각 2021.04.0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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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시절은 영도에서 시작됐다.
어릴 적 우리가 곧잘 들었던 말이 있다. “너는 영도다리에서 주워왔단다. 말 안 들으면 다리 밑에 다시 데려다준다!!!” 울음도 뚝 멈추게 했던 곶감보다 더 무서운 '영도다리'
내 또래의 친구들은 모두 영도다리에서 선택받아 우리의 엄마 아빠가 된 줄 알았고, 영도다리는 가고 싶지 않은 공포의 대상으로 어린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전쟁때 피란민들 가족찾는 만남의 장소였던 '영도다리'
코로나로 멈춘 추억 다시 활짝 열리기를

 

 

영도다리를 오랜만에 가 보았다.
요즘은 새로 생긴 부산대교로 차를 타고 휙 지나가 버리기에 '영도대교'란 새 이름표를 단 영도다리를 지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영도대교는 1934년에 개통된 국내 유일의 도개교이다. 해상교량 구간이 214m로 일제 식민통치시대에 섬을 육지화해 영도 조선소에서 만든 군사물품을 조달하기 위한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는 부산으로 피난 온 실향민들이 잃어버린 가족을 만나기로 한 애환의 장소로 유명하다.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가 국민가요로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영도다리를 넘어오니 현인의 동상이 눈길을 끈다.

어릴 적 우리 집에 친척이 오면 꼭 들리는 곳이 있었다. 바로 영도다리 도개시간에 맞춰 구경가는 거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부산의 관광코스 제1위였을 거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천천히 다리가 올라가며 큰 배들이 지나가는 장면은 슬로비디오 보듯 약15분간 멋진 장면을 연출시켰다.

다리 옆으로 계단으로 내려가면 점바치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할아버지들이 한복을 입고 바닥에 종이를 깔고 앉아있었던 기억이 난다.
왜 그렇게 많았을까?
한국전쟁 후 부산 인구가 30만 명인데 영도다리에 도착한 피란민은 100만여 명. 가족의 이름을 적은 종이나 헌 옷을 영도다리 난간에 빽빽이 붙이고 ,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은 궁금증에 한 가닥 희망을 잡으려고 점집을 찾기 시작했단다.

유라리 광장에 설치된 가족형상의 조형물이 그 시대의 아픔을 한눈에 보여주는 듯하다.
‘영도다리! 거~서 꼭 만나재이’

보따리를 등에 업고 이고 내려온 피란민들은 만나서 잘 살고 있겠지?

영도다리와 함께한 나의 어릴 적 추억들도 다시 기억의 서랍함에 고이 간직하고 돌아선다.

[기사Q&A] 유라리 광장은? 유라시아 유럽과 아시아 대륙의 국도 7호선 시점과 종점이다. 유럽의 '유'와 아시아의 '라' 그리고 사람과 마을이 모여 즐겨 노는 소리를 뜻하는 '리'의 조합으로 유럽과 아시아인이 함께 어울려 찾고 즐기는 장소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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