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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김차웅 칼럼] 신품종시대를 연 기장양식산 다시마
2017. 10. 08 by 정관타임스Live

뙤약볕이 내리쬐는 5~6월경이면 어촌은 막 채취한 양식산 다시마를 말리느라 분주하다. 이런 진풍경은 양식업자들의 피땀 어린 정성이 만들어낸 결실이기도하여 감회가 깊다.

민간인으로서 우리나라 다시마의 최초 양식업은 부산 기장군 일광면 학리 김용대(金龍大, 1938년생)씨에 의해 이뤄졌다. 김씨는 1967.9초순경 다시마 모조구입을 위해 국내 굴지의 활선어 수출회사인 금창무역(대표 김대규) 소속 수출선인 희영3호 편으로 북해도산 애기다시마와 아오모리산 참다시마 등 2종의 우량종묘 100kg을 국내에 반입, 고향마을인 학리에 있는 본인 소유의 미역종묘배양장에 넣어 약 3개월만인 1967.11말경 종묘 30,000m를 배양한 뒤 이를 한 달 정도 가이식하여 어린 엽체를 육안으로 볼 수 있게끔 하였으나 당시만 해도 양식을 자원하는 사람이 없어 대부분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국립수산진흥원(현 국립수산과학원)의 경우 장정원연구원이 쓴 “다시마 양식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보듯 ‘1967.11경 일본 홋가이도 수산연구소[福厚英司]에서 애기다시마 모조를 구입, 1968.2에 첫 종묘를 배양한데 이어 이를 울산 일산동 지선 앞 바다에 가이식하여 성공을 거뒀다.’고 함으로써 연구기관으로서의 진행과정을 읽을 수 있다.

앞에서 보듯 김씨는 당시 진흥원보다 먼저 모조를 구입하여 가이식까지의 진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소한 사업에 대한 어업인들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종사판매에만 매달려 직접 양식을 하지 않은 것이 잘못임을 알고는 1969년(1979.11.3 국제신문에는 1970년으로 나와 있음), 자가생산한 종사 중 5,000m를 일광 앞바다에 시설하여 수확함으로써 성공을 거뒀다.

이로써 일본 북해도에서만 서식할 줄 알았던 다시마가 우리나라 동해남부지방의 앞바다에서도 양식이 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됐고 지금까지 다시마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던 우리나라 어업인들에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또한 김씨는 견학 온 외지인과 수산관계자들에게 미역만으로는 타산에 한계가 있는 만큼 미역의 후속사업으로 다시마를 연작함으로써 소득을 배가할 수 있음을 손수 경험을 통해 일깨워주었다.

사실 당시로서는 다시마가 미역처럼 보편화되지 않았고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다시마에 대한 상식이나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당장 판로가 문제였다. 다행히도 주간지인 수산신문(이름 및 날짜 미상)에 김씨의 양식다시마에 대한 기사가 보도된 이후 종묘구입이 쇄도하는 등 전국 어촌으로 파급되면서 비로소 어업인들의 주목을 받게 됐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수입한 종자가 수산진흥원 측은 애기다시마라는 단일 품종으로서 전국 지소의 연구실에 시험용으로 배정됐을 뿐인데 반해 김씨는 애기다시마와 참다시마 등 2종을 배양하여 어업인들에게 민간차원에서 전파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5년도 발간된 수산해운계 고등학교 교과서에 일본 홋가이도 등지에서 생산되는 다시마 모조를 구입하여 우리나라에서 처음 다시마를 양식하게 됐지만 누가, 언제, 어디서 종묘생산과 함께 양식을 했고 어떻게 신품종이 탄생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아쉽다. 지금이라도 이에 대한 보도와 보완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기장지역에서 양식되는 다시마가 함경남도 원산지방에서 서식되는 개다시마와는 구분됨에도 불구하고 기장다시마를 이북 원산지역의 개다시마 종묘로부터 추출된 것이라 하여 국내 양식의 근원이 북한산이다 함은 역사인식이 잘못된 것으로 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대해 김씨는 양식다시마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나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탓으로서 다시마양식업계와 어업인의 복리를 맡고 있는 수산관계자들이 너무 안일했다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또 한 가지 김씨에 의한 종묘의 특징은 두 품종이 한 탱크(수조)에 혼합돼 추출되고 성장하는 등 40여 년 간 근친 종묘로 이루어짐에 따라 현재 우리나라의 다시마는 평균적으로 큰 것은 길이 3~4m, 너비 0.3m정도이고 작은 것은 길이 1.5m, 너비 0.1m정도여서 사실상 신품종임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렇듯 국내 양식다시마의 근원은 일본이지만 그곳 자연산 다시마의 종자 반입 후 40여년이 지난 지금, 양식다시마 신품종의 온상이 기장지역이고 보면 기장다시마를 ‘기장 제1호(機張第一號)’로 명명해야함은 너무도 당연하다하겠다. 왜냐하면 중국이 1953년 다시마를 첫 양식하여 ‘청도 제1호(靑島第一號)’라 함으로써 그들의 특산물이 됐기 때문이다.

양식이 가져다준 최고의 선물인 다시마는 미역과 함께 어패류에게 먹이와 서식처의 공간을 만들어주는 환경 친화적인 해조류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이들 양식업으로 인해 어업인의 소득이 크게 불어났다. 1970년대부터 어촌의 가난을 극복하고 국민건강에 없어서는 안 될 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는 양식산 다시마의 자취가 궁금하여 지난날을 돌이켜본다.

김씨가 일본으로부터 모조를 들여와 퍼트린 행위야말로 고려시대 문익점이 중국으로부터 목화씨를 들여와 퍼트린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또한 국립수산진흥원과 같이 애기다시마란 단일 품종만 보급했다면 오늘날처럼 김씨에 의해 개량된 신품종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글=김차웅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전)
기장문화(기장문화원) 편집인(전)
일광면지편찬위원회상임위원(전)
차성가연구회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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