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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차웅.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전). 010-3889-4989
[기고] 김해허씨의 유래와 인물
2021. 10. 21 by 정관타임스Live

김해김씨의 후손은 왕족 중의 왕족이라 할 수 있다. 500년의 왕업을 이어온 가락국의 시조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사이의 후손이어서 그렇다. 이들 혼인은 우리나라의 역사상 최초의 국제결혼이어서 뜻이 깊다.

김수로왕은 향년 158세, 허왕후는 157세의 수를 누렸다 한다. 장수의 표본이기도 하다. 김수로왕에게는 난생설이 있고 알에서 동자로 변한 지 10여 일 만에 신장이 9척이나 됐으며 민주적인 방식에 의해 왕으로 추대됐다고 전해져 온다.

우리나라는 현재 김해김씨의 후손으로 허씨와 인천이씨 그리고 양산이씨가 있다. 허씨의 성은 어디서 유래할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가락국의 초창기 왕실의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수로왕은 서기 42년 김해 구지봉에 탄강하여 가락국을 세우고 48년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바다신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파사석탑을 싣고 김해에 당도한 허왕후를 배필로 삼아 모두 10명의 왕자와 2명의 왕녀를 낳았다. 왕보다 여섯 살이나 위였다는 왕후는 행복했으면서도 친정이 머나먼 타국이어서 외로웠다. 왕후는 죽기 전에 허씨성이 이어지기를 간청했다. 왕은 이를 받아들였고 둘째와 셋째에게 외가의 성을 잇게 했다. 이로서 허씨가 김수로왕의 자손이 되게 됐다.

허왕후는 서기 189년 3월 1일 세상을 떠났으며 김수로왕은 10년 뒤인 199년 3월 23일에 붕어했다. 가락국은 제10대 구형왕 때 신라에 병합됨에 따라 후손들은 김해 등 여러 지방에 흩어져 살게 됐다.

허씨로는 김해허씨, 하양허씨, 양천허씨, 태인허씨, 한산허씨 등 5개의 본이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이 가운데 김해에 살던 후손을 김해허씨라 한다. 이의 중시조는 허염許琰으로서 고려 문종 때 벼슬이 삼중대광에 이르렀고 가락군으로 봉해졌다. 김해허씨의 세보를 보면 보주태후(허왕후)의 35세손으로 돼있으며 허염이 본관을 김해라 한 것은 김해에서 세거했기 때문이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보주태후普州太后는 허왕후의 사후에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허왕후의 능침 앞에 서있는 비석에 새겨진 글귀이기도 하다. 비문을 보면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 릉駕洛國首露王妃普州太后許氏陵’이라고 쓰여있다.

왜 보주태후라 했을까? 능을 찾을 때마다 사람들은 여기에 관심이 많다. 보주를 두고 사학자들 사이에 몇 가지 설이 제기된 것도 그 때문이다. 대표적인 주장을 옮겨본다.
하나는 허왕후가 보주에서 온 왕비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보주는 아유타국이라 하였고, 다른 하나는 보주가 중국의 한 지명으로서 허왕후의 연고가 있게 된 것은 인도 아요디아가 멸망하자 백성들이 중국의 보주 땅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살다가 기원후 47년에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함에 따라 기원후 48년에 허왕후의 일행이 뱃길로 탈출하여 가야로 건너오게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이 맞기나 한 걸까? 주요 문헌인 <삼국유사> ‘가락국기’ 편을 들여다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이에 의하면 "허황옥이 맨 처음, 김해에 당도하여 수로왕에게 아뢰기를 ‘저의 부왕과 황후가 밤에 똑같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 하늘에서 온 수로왕이 배필을 못 정하였으니 저를 그곳으로 보내 배필로 삼으라.’라고 해 김해로 오게 됐다”라고 했을 뿐 중국 보주에서 살다가 김해로 왔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 후자의 설은 상당한 학술적인 추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근거가 되기엔 미흡해 보인다.

왜냐. 허황옥이 중국 보주를 거쳐 이곳에 왔다면 허황옥이 수로왕에게 왜 그 말을 당시에 아뢰지 않았을까란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주는 한문으로 넓은 고을 즉 국가란 뜻이어서 전자와 같이 허황옥의 고향인 아유타국을 말하는지도 모르며 따라서 망자의 시호로 보이는 보주에 대한 집중적인 고증이 있어야할 것 같다.

허씨의 주요 인물로는 조선시대에 이름을 떨쳤던 허난설헌, 허균, 허준, 허목, 허적, 허유가 있으며 근대에 이르러선 허정, 허문도, 허삼수, 허화평, 허경영 등이 있다. 근대 인물의 공통점은 모두 정치인이며 김해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허정을 보면 우리 헌정사에서 대통령권한대행직을 잘 수행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있다. 이승만대통령이 3.15부정선거로 쫓겨나고 부통령이 사직함에 따라 외교부장관이던 그가 3개월 여간 권한대행을 맡아 이 기간 동안 내각제개헌을 실시하고 총선을 원만히 치름으로써 과도정부를 잘 이끌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허문도로서 그는 칼보다는 펜이 더 무섭다며 그의 자리가 하마평에 오를 만큼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제5공화국 시절의 실세로서 언론인 강제해직과 언론통폐합 등을 주도했으며 뒤에 그는 국토통일원장관을 지냈다. 당시 3허三許라 하면 자신을 비롯하여 허삼수와 허화평을 일러 하는 말이다. 이들 중 허문도만은 군 출신이 아니다.

허삼수와 허화평은 육사출신으로서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육군보안사령부의 요직을 거쳐 다 같이 준장으로 예편하였으며 뒤에 각각 국회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전두환대통령의 최측근인 이들은 노태우 등과 함께 12.12쿠데타에 참여, 정권을 찬탈하였다는 혹평을 받고 있다.

그 다음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가 허경영이다. 그는 문재인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세 번에 걸쳐 대통령에 출마했으며 노무현 후보로 인해 기권한 적이 있다. 장기간에 걸쳐 유튜브 강의를 함으로써 세계적인 명강사로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지난 4.15 총선 때는 33정책으로 돌풍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현재 국가혁명당의 명예총재인 그는 과거 민중당시절, 서울 은평구에서 시의원에 출마하여 전국에서 최다득표를 함으로써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꿈이었던 그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2021년 4월 7일 서울시장보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이어 대통령이 되면 재임기간 동안, 무보수 명예직으로 봉사할 것이며 판공비 등은 전액 자담으로 하겠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2022년 3월 9일 치러질 대통령선거에 일찌감치 출사표를 던짐으로써 세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저서로는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 <난세의 영웅, 허경영을 아십니까?>, <허경영의 영성시대가 세계를 이끈다>가 있다.

※외부기고 또는 칼럼은 본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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