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차웅 칼럼] 차성문화제 명칭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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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차웅 칼럼] 차성문화제 명칭 유감
  • 김항룡 기자
  • 송고시각 2017.12.06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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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은 지리적으로 동해남부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계절적으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해양성기후여서 생활하기가 알맞은 곳이라고들 한다.

기장이라 하면 가장 먼저 찾기 쉬운 기장시장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규모는 작지만 조선시대부터 읍내장(5, 10)으로 통했던 전통 있는 장이기도 하다.

요즘 동해남부선 경전철을 타면 차량 맨 뒤 칸에 기장시장을 알리는 홍보물이 있어 기장을 알리는데 한몫을 한다.

기장은 예로부터 품질이 우수한 기장미역과 약성이 뛰어난 기장인삼이 궁중에 진상된 데다 오랫동안 기장이라 이름 붙여진 붕장어, 멸치, 갈치, 곰장어, 오해조(곤포), 광어, 복어, 대구어, 앙장구 등 토산물이 시장의 주요 품목이 돼왔고 최근에는 기장해안을 중심으로 양식업이 본격화됨으로써 기장다시마가 각광을 받음에 따라 외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기장은 신라 때 원효대사가 선여사, 취정사, 장안사, 척반암 등을 건립한 탓에 불교와 인연이 깊다. 기장은 예로부터 유배지로도 유명하다. '조선왕조실록'이나 '효전산고(심노숭)' 등을 보면 유배자가 60명이 넘는다.

기장은 고려시대부터 기장역이 생겨 교통의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이 기장 죽성에다 왜성(일본에서는 기장성이라 함)을 쌓아 5년 동안 침략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기장현감 이용준이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쳤다는 이유로 임진왜란이 끝나자마자 선조임금에 의해 강제 폐현됨으로써 기장이 주목받기도 했다.

기장은 조선 숙종 때 미역진공을 위해 원전이 들어선 지금의 고리(옛 지명은 화사을포리)가 궁중에 속함[원문 : 火士乙浦里龍洞宮屬]으로써 이름을 드높였다. 또한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는 기장어업조합이 발족돼 기장미역, 기장붕장어 등 수산물이 대거 반출됨에 따라 기장이 일본지역에도 널리 알려져 왔다.

기장은 최근 고리와 신고리원전으로 인해 세계적인 명소가 됐다. 기장에는 국립수산과학원, 동남원자력의학원, 동부산관광단지, 기장현대차드림볼파크야구장, 힐튼호텔 등이 들어서면서 기장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고 있다.

기장출신의 인물로는 일제강점기 배일/거두(排日/巨頭)로 기록된 구영필을 비롯하여 한글학자 김두봉, 민주당총재 박순천여사, 박태준 전 국무총리, 김약수 전 국회부의장이 두각을 나타냄으로써 기장이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됐다.

기장은 오영수가 '갯마을'이라는 작품을 냄에 따라 문학비가 세워졌고 1965년 김수용감독의 영화제작으로 인해 이름을 떨친 곳이기도 하다.

기장은 풍수대가인 장영훈의 말처럼 풍수지리의 산실이다. 기장의 향토가사인 '차성가(1860)'에서 보듯 기장은 옥황상제의 딸인 옥녀가 베틀[機]을 차려놓고[張] 물레질을 한다는 이른바 옥녀직금형국의 요체가 되고 있다. 기장은 군사상의 요충지다.

기장이라는 지명은 지리적인 특성상 갑병(甲兵)으로 국토를 지키기 위해 변방을 수비한데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음으로 정중환 전 경남문화재위원이 내세운 ‘노기기장(弩機旣張)’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어 한층 뜻이 깊다.

이렇듯 기장은 예로부터 잘 알려진 지명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기장에서 치러지고 있는 문화제의 명칭이 기장이 아닌 차성(車城)이어서 실감이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1995.3.1 기장군이 복군된 이후부터 문화제행사 때마다 줄곧 차성을 내세우고 있지만 생소한 탓에 차성이 기장의 옛 지명인지 모르는 사람이 이외로 많기 때문이다. 차성은 1733년 기장현감으로 출척된 권적이 기장으로 오면서 차성이 어디쯤 되는가 하고 읊조렸고 추사 김정희가 그의 시인 '자연기'에서 바둑돌이 나는 곳이 차성현이라 하여 이름을 올렸으며 그리고 기장이 최근 양산군에 속했을 때 기장사람들이 만든 차성유신회가 발족되면서 잠시 차성을 들먹였을 정도다.

지명인 기장과 차성의 관계를 보면 문헌상 기장이 본호(本號)고 차성이 별호(別號)다. 즉 사람으로 치면 기장이 본명, 차성이 별명이다. 기장과 차성이 등장한 시기는 언제일까. 기장현은 신라 때인 경덕왕16년(757)에 생겼다고는 하나 기장은 이전부터 있었던 지명이고 차성은 고려현종9년(1018)에 생겼다. 기장이 차성보다 훨씬 앞선다. 문제는 차성이 기장뿐만 아니라 수원도호부 산하에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에서 보듯 기장지역이 아닌 차성현은 통일신라 때 당진군에 소속된 두 개의 현 가운데 하나로 고구려에서는 상홀현 또는 차홀현이라 했다가 신라 경덕왕이 차성현으로 고쳤으며 고려시대에는 용성현이 됐다고 하였다. 이처럼 기장은 하나밖에 없지만 차성은 다른 곳에도 있었음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기장이 오래된 지명임은 '삼국유사' 제5권(신주 조)의 ‘혜통항룡’ 편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신라 효소왕(692~701년 재임) 때 독룡(이무기)이 기장군 관내에 있는 기장산(機張山)에 숨어들어가 백성들을 괴롭히자 혜통국사가 기장을 찾아 불살계로 단속하여 독룡을 물리쳤다는 기록에서 보듯 기장은 1,300년 전인 신라 때부터 있었다. 여기서 기장산이라 한다하여 고유의 산명이었을까. 기장산은 기장에 있는 산이라는 뜻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고 보면 기장만큼 유서가 깊은 지명도 드물며 기장의 발전상으로 보아 지금은 기장시대라 말할 수 있다. 이쯤 되면 기장에서 개최되는 문화제의 명칭도 달라져야하지 않을까. 차성은 일찍이 성곽 때문에 이름 지어졌지만 제대로 된 성곽이 없어 현재로서는 이름에 걸맞지 않아 차성이 생뚱맞다는 생각이 든다.

기장시장을 차성시장이라 하고 기장미역을 차성미역이라 하면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는가. 낯익고 브랜드화 된 지명으로 문화제의 명칭을 사용하면 될 것을 왜 굳이 낯설고 가늠하기 어려운 이름을 내세우는지 모르겠다. 기장이든 차성이든 이름이 뭐 그리 중요하냐는 혹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명이 전제된 축제일수록 상징성과 대중성이 있어야한다. 사람의 이름이 소중한 것과 같이 축제도 마찬가지다.

축제는 한마당잔치로서 대중성의 비중이 매우 크다. 그런 만큼 차성보다 지명도가 높은 기장이어야 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글=김차웅
전 기장문화 편집인. 차성가연구회연구위원.
010-3889-4989 

<외부칼럼은 본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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