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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와 살아내기] '블루엣'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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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와 살아내기] '블루엣'를 읽고...
  • 송지현 기자
  • 송고시각 2024.05.2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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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색을 좋아하세요?
파란 글씨로 쓰인 파란 책 담긴 블루에 대한 예찬

 

 

 <기장일보/송지현 기자>=단순히 색채를 마주치는 것만으로 저릿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사실 이 책을 펼쳐보게 된 계기는 단순한 구매라기보다는, 차라리 운명적인 만남에 가깝다. 마치 가까이 가져다 대었더니 철컥 소리와 함께 달라붙어버리는 자석퍼즐처럼 말이다.

살다 보면 시나리오의 한 장면이라 가정하더라도 개연성이 없을 만큼 기막힌 우연이 이방인처럼 불쑥 우리 삶을 찾아오지 않는가! 한 손에는 칼을 벼려 쥐고, 한 손에는 초콜릿 한 상자를 든 이방인 말이다. 책과 나의 만남은 진홍색 리본이 묶인 화이트 초콜릿 상자에 가까웠다. 그 상자를 열면 얼그레이와 딸기 프랄린으로 속을 채운 트러플 화이트 초콜릿이 체스말 조형으로 줄지어 있을 것이다. 이 만남의 비현실성을, 나는 파란색에 대한 주제가 나올 때마다 강조하곤 했다. 미안한데 그 얘기 나 다섯 번은 들었다. 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

정확히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은 근사한 식사를 대접해야 하는 어느 초여름 정오였다. 나는 구름 한 점없는 빈티지 블루의 하늘색조차 성에 차지 않았는지 아난티코브를 약속 장소로 선택했다. 사실 약속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아난티코브의 해안산책로를 걷고 싶은 게 장소선정의 이유였다.

내 고양이의 털빛과 같은 암회색 해안절벽, 고개를 빼고 그 너머를 보면 비현실적인 암청색의 바닷물이 흰 바늘같은 윤슬을 일으킨다. 갈대 너머 이끼처럼 깔린 톤다운 옐로우 그린의 잔디밭엔 배부른 고양이 몇 마리가 뒹굴고 있으며 계단을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가면 기가 막힌 아이스크림도 사먹을 수 있다.

초여름, 맑은 하늘, 더운 날씨, 선선한 바람. 여하간 블루를 만나기 위한 체크리스트가 있다면 파란 펜을 들고 체크, 체크, 체크를 해야만 하는 날이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드레스코드를 맞추어야 했기에, 학생 때부터 십년은 족히 입어 얇아진 런던 블루빛 에스닉 원피스를 입었다. 그리고 식사대접은 안중에도 없이 그 푸른 장소를 온전히 즐겼다. 그러나 아난티코브의 커다란 서점으로 들어간 것은 순전히 충동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해안산책로는 숨막히게 아름다웠으나, 날씨가 정말이지 너무나 더워서, 땀을 좀처럼 흘리지 않는 나조차 육수를 흘리며 흐느적거리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서점의 유리문이 열리자 에어컨 바람이 맹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한동안 나는 일행과 함께 서점에서 땀을 식혔다. 시정잡배마냥 큰소리로 날이 얼마나 더운지에 대해 불평하는 것이 지루해지자, 나는 곧 제목조차 읽지 않고 표지가 마음에 드는 책 몇 권을 뽑아 들었다가 도로 제자리에 넣었다가 하는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리고는 이제 가자, 라고 말하려는데, 새파랗고 얇은 책등과 딱 마주치고 만 것이다.

‘운명적으로’.

나는 망설임없이 책을 뽑아 들었고, 심지어는 책의 제목조차 블루엣이었다.
 
‘파란색과 사랑에 빠진 이야기. 그 240편의 에세이’라는 소개가 수평선 같은 호선을 그리며 일러스트 하나 없이 새파란 표지를 장식한다.
 
믿어지는가? 자가용도 없는 주머니 가벼운 무직 여성이, 오로지 파란색을 만끽하기 위해 더위를 뚫고 대중교통을 거쳐 도착한 이곳, 교통사고처럼 우연히 마주친 책이 바로 이 에세이다. 블루엣. 나는 부담 없을 정도로 얇은 메기 넬슨의 에세이 집을 펼쳐보았다. 

아아, 글씨마저 모조리 쨍한 울트라마린이다. 나는 당장에 그 책을 손에 들고 계산대로 걸어갔다.
 
먹어 없앤 음식을 제외하면 그날 아난티코브에서 구매한 유일한 물건이었다.

해안가를 산책하는 사람들은 종종 바닷물에 젖어 꽤 눈에 띄는 색을 뽐내는 조약돌을 주머니에 넣곤 한다. 그러나 그 둥근 돌이 표면의 물기와 함께 빛깔을 잃고 나면 낙심하고 만다. 고향을 떠나온 조약돌의 종착지는 대개 화분 위나 현관문 앞 선반이며, 습득자의 기억 속에서 장소와 빛깔, 돌의 의미는 사라진다. 그렇게 그 돌과의, 정확히 그 돌의 빛깔과의 운명적 만남은 퇴색되고 만다.

하지만 내가 산 이 책은 어떤가. 아난티코브의 울트라마린 바다빛을 담은 이 찬란한 책 표지를 보라. 나는 건조한 환경에서도 시린 빛을 뿜는 조약돌을 주운 여행자마냥 뿌듯했다. 나는 살바도르 달리처럼 도취하여, 그 책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모두가 내 발견을 알게 하고 싶은 욕망을 억눌렀다. 대신 그 새파란 책을 가방에 넣지 않고 구태여 손에 쥐고 돌아다니며 종일 콜럼버스적 낭만에 젖어 있었다.

중세 성모가 걸친 로브의 음울한 블루, 베르테르와 오터프딩겐의 다크 블루, 운석을 녹여 만든 투탕카멘 단검의 서슬 퍼런 반사광, 가나가와 해변 파도의 프러시안 블루... 역사 속 많은 흔적들은 블루를 흠모하는 자들에게만큼은 일종의 블루를 향한 찬미이다.

내게 있어서 블루는 참으로 역사가 깊은 색깔이다. 세계적인 미술관에 걸린 명작 속 여신의 치맛자락에서부터, 먼지 쌓인 뽑기 기계 속 물개 장난감에 이르기까지, 나의 발길을 부여잡으며 비생산적이고 시간소모적인 결과를 낳을 만큼이나 치명적인 색깔이다.

매기 넬슨의 블루처럼, 지극히 개인적이고, 서글프고, 뾰족하고, 끈끈한 의미로.  

블루엣 (매기 넬슨 저)
6. 눈이 멀 듯 찬란한 터키옥 색의 반원형 바다는 이 사랑의 원초적 장면이다. 이런 블루가 존재하고 이런 블루를 본 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의 삶은 경이로워진다. 이토록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그 가운데 존재하는 자아를 느끼고. 선택의 여지는 없다. 어제 그곳으로 돌아가 한 번 더 산꼭대기에 올라섰다. 
30. 색깔이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절망을 안겨줄 수도 있다는 말일까? 블루라는 빛깔 덕분에 갑자기 희망을 느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자동차를 타고 절벽 길을 달리다가 급회전을 했는데 눈앞에 문득 바다가 펼쳐졌을 때. 남의 집 화장실이 당연히 흰색일 거라고 생각하고 불을 켰는데, 사실은 로빈에그 블루였을 때. 윌리엄스버그 다리 위, 시멘트에 콕콕 박혀있는 네이비 블루 병뚜껑들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멕시코 유리공장 야외에서 깨진 파란 유리조각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반짝이는 광경을 보았을 때.) 블루로 인해 절망을 느껴본 기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동래에서 출발하여 철마를 거쳐 정관으로 넘어가는 1008번 버스, 갖가지 이유로 그것을 타고 다닌 지 장장 10년이 넘어간다. 배차 간격이 길고 이용 승객이 많은 탓에 거대한 고속버스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얼굴은 대체로 피로와 짜증으로 물들어있다.
 
하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빈 자리가 있다면 가급적 창가에 앉아보자. 지나가는 길은 노상 같을지라도, 차창 너머는 결코 늘 같은 풍경이 아니다. 오히려 무성의 화사한 필름이라 할 수 있다. 

블루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아스팔트 도로와 그 위를 줄지은 차의 반사광과 그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페인트 색으로부터 눈을 돌려야 한다. 
 
시선을 멀리하면 암녹색 산의 능선과 햇살 아래 비현실적인 올리브 그린으로 번뜩이는 동백나무 잎, 수원지 반대편 샢 그린 숲 어귀에 비밀스럽게 자리잡은 맑은 못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도 블루, 자연에서 웬만해선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블루가 10분 남짓한 여정의 백미이다.
 
터널을 하나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는 곡선구간을 지나며 커브를 돈다. 승객들과 버스 운전사는 기우뚱하니 몸을 밀어 넘어뜨리려는 관성에 저항하기 위해 단전과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준다. 하지만 그때에 중심을 잡는 데에 정신이 팔려선 안 된다. 

차창 너머 바로 그곳에, 탐스럽게 피어난 500원 동전보다 큰 푸른 꽃의 군락이 있다. 도롯가에 피어난, 아마 인위적으로 심겼을 그 탐스럽고 화사한 꽃의 군락은 의심의 여지 없는 푸른 빛이다.
 
혹 넘어지지 않기 위해 진을 빼느라 푸른 꽃들을 보지 못했다면, 아쉬워 말라. 두 번째 터널에 진입하기 전, 어떤 초록빛 잎도 없이 청보라빛 꽃술만이 넘치게 매달려 하늘거리는 나무 두 그루가 자신을 눈여겨 봐주길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나는 아직도 두 식물의 정확한 학명을 모른다.  

블루엣 (매기 넬슨 저)
63. 일반적으로 말해 나는 파란 것들을 일부러 물색하지 않고, 돈을 주고 사지도 않는다. 내가 애지중지하는 파란 것은 선물, 아니면 풍광 속에서 문득 찾은 놀라운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이번 여름 북부 지방에서 파낸 돌멩이들. 하나같이 가운데에 밝은 파란색 줄이 신비스럽게 칠해져 있다. 또 오래전, 우리가 서로 잘 알지도 못하던 시절, 당신이 포장지로 고이 싸서 내게 가져다준 네이비 블루 나염 안료.

 이른 아침 쿠키를 굽기 위해 서둘러 출근하는 엄마의 티볼리 안에서, 들꽃 색 따위 알아볼 수 없는 늦은 밤 나를 데려다주는 아빠의 트럭 안에서, 나는 미취학 아동일 때 했던 행동을 반복했다. 두 사람이 그것들을 보든, 보지 못하든, 보지 않든, 묻고 또 물었다. 

저 꽃은 무슨 꽃이야? 아빠, 아까 곡선구간 돌 때 파란 꽃 이름 알아? 몰라. 초여름에 많이 펴. 
 
엄마, 저 청보라색 꽃피는 나무 있잖아. 봤어? 아니. 무슨 나무일까? 등나무꽃? 등나무꽃은 지금 안 펴. 라벤더? 밥통아, 라벤더는 나무가 아니잖아. 라일락 아니야? 아니야. 그럼 대체 뭔데. 

무지에서 오는 신비감일까? 견딜 수 없이 궁금하면서도, 만지거나 알 길이 없다는 사실이 저리기도 했다. 고화질의 사진을 찍을 수도, 한송이 꺾어볼 수도 없는 꽃술들. 버스에서 잠깐 훔쳐볼 수나 있을 뿐 만날 수 없는 푸른 꽃들. 

하루는 들꽃사냥에 나선 적이 있다. 들꽃사냥이라 함은 나와 내 친구들이 누군가 부러 심어두지 않은 잡초꽃 따위를 꺾어 압화 책갈피로 만드는 일을 거창하게 부르는 말이다. 서빙을 하며 눈여겨 봐두었던 파란 들꽃을 꺾기 위해 네발짐승처럼 아버지의 정원을 기어 다녔다.
 
개불알꽃(이토록 무심한 이름이 있을까), 그리고 유난히 꽃대가 약해서 툭하면 꽃잎을 떨어뜨리는 이름 모를 파란 들꽃. 그 옹졸하리만치 작고 연약한 꽃잎은 그것을 내가 코팅지 사이에 끼울 때까지 온전한 모습을 유지해주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 손에 닿을 수 없는 블루는 포도송이만큼 탐스러울까. 1008번을 탈 때마다 곡선구간을 흘깃대며 탄식하곤 한다. 

블루엣 (매기 넬슨 저)
65. 파란 염색약 포장지에 인쇄된 사용법. 블루를 천에 쌉니다. 마지막으로 헹구는 물에 블루를 쥐어짜면서 휘젓습니다. 염색할 물건을 하나씩 따로 잠시동안 담급니다. 물건을 계속 흔듭니다. 나는 이 사용법이 좋았다. 나는 계속 움직이는 블루들이 좋다. 

블루란 내가 말을 하고 걷는 순간부터 나의 뮤즈이자 보석이었다.
 
크레파스 케이스에서 파란색을 뽑을 때에, 서툰 손으로 그를 부러뜨리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심혈을 기울였으며, 숨겨야만 하는 외사랑처럼 남몰래 불법 주차된 용달 트럭의 블루를 흠모하기도 했다. 물론 어린 내가 파랑을 가장 사랑하게 된 데에는 어린아이 특유의 심리도 한몫했다. 내 또래 여자아이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계집아이스런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그를 멀리한다고 과시하며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미술 선생님은 수채화물감을 짜 금속 팔레트에 굳히는 작업을 시키곤 하셨다. 티타늄 화이트 오른쪽 방향에서 횡으로 줄지은 따스한 물감들, 나는 그 속에 끼지도 못할 오페라를 제외하고 나면 온색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 나의 관심사는 왼쪽에 세로로 짜놓은 블루들이었다. 오직 블루만을 열렬히 사랑했다.
 
울트라마린, 세루리안 블루, 프러시안 블루, 그 색들을 조심스레 붓으로 녹여, 투명한 물 한 잔을 목적 없이 맑은 블루 한 잔으로 바꾸곤 했다. 

블루엣 (매기 넬슨 저)
108. ... 루신다 윌리엄스는 이렇게 노래한다. “내가 외로울 때 블루는 나를 사랑해주고 / 나를 가장 먼저 생각해준다.” 사실 굉장히 기이한 얘기다. 블루에 심장 뿐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도 있다는 얘기니까. 
164. ... 블루에는 정신이 없다. 현명하지 않고 어떤 지혜도 약속하지 않는다. 블루는 아름답다. 시인과 철학자와 신학자의 말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름다움이 진실을 가리지도 드러내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은 정의로 이끌지도 않고 정의에서 멀어지게 만들지도 않는다. 블루는 파르마콘이다. 빛을 내뿜는다. 

제인과 나에게는, 먼 길을 떠나기 전이나 크게 다툰 후 ‘커미서리’에 들러 입을 즐겁게 할 정크푸드를 사는 일종의 관례가 있었다. 치즈 맛이 나는 디핑소스와 세일 스티커가 붙은 로티세리 치킨을 제쳐두고 우리의 쇼핑리스트 중 가장 중요한 항목은 단연 게토레이였다.
 
게토레이 음료는 정말이지 다채로운 색의 옵션을 가진 이상한 음료였다. 더욱 매력적인 건, 그 작위적이고도 거부할 수 없는 색의 음료들은 각기 다른 인공향료의 맛을 낸다는 점이다. 딸깍, 뚜껑을 열어 맛을 보기 전까진 이 체리 레드가, 퍼머넌트 옐로우 딥이, 비리디언과 크림슨 레드가 무슨 맛일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선택은 이것저것 재고 따질 것도 없이 단연코 채도 낮은 청색의 게토레이였다. 초등학생의 물감 팔레트를 열어 물을 흠뻑 묻힌 붓으로 울트라마린 조금과 탁한 티타늄 화이트를 녹인 다음, 물병에서 휘휘 저어 만든 색깔 물 같았다. 그건 식용색소를 탄 음료라기보단 자동차 워셔액에 가까웠다.

제인은 낑낑거리며 6개들이 묶음을 들어 올려 쾅! 하고 카트에 실었다. 우리는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땀 냄새 풍기는 새벽을 보낸 다음, 잠에서 깨면 탁상에 미리 가져다 둔 그 파란 물로 손을 뻗곤 했다. 나는 달콤한 맛에 감탄하며 도로 그를 탁상에 내려놓고는 그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리고 동이 트며 날카로운 아침 햇살이 그 플라스틱 병을 투과하는 것을 감상하곤 했다.
 
게토레이 물병을 투과한 여명은 가늘게 눈을 떠야할 만큼 오묘한 청보랏빛이었다.

어떨 때는, 우리는 로드트립을 떠나기에 앞서 엄숙하고도 공식적인 행사처럼 네 묶음의 청색 게토레이를 카트로 끌어와 차 뒷좌석에 던져넣기도 했다. 그것이 지중해의 열기에 이글이글 끌어올라 뜨끈뜨끈한, 단순히 혈당 스파이크를 일으키는 불쾌한 색소물이 되어 버릴지언정, 투덜대는 두 여성이 갈증을 느끼고 손을 뻗는 곳은 다사니 물병이 아닌 항상 파란 게토레이였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그 물병을 코앞에 들이대고는, 광활한 포도밭 평야를 비추어보는 색깔 렌즈로 쓰기도 했다. 오래된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홈 비디오나 라나 델 레이의 뮤직 비디오에서 나올 법한 빈티지한 로드트립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다시는 볼 수 없는 모습임을 알기에 나는 그것을 뚫어져라 응시하곤 했다. 

블루엣 (매기 넬슨 저)
102. 사고 이후 내가 친구를 돌보고 있다. 언제나 조심스럽고도 어려운 일이다. 시중드는 일 자체가 고통을 불러일으키곤 하기 때문이다. 이 년 동안, 친구를 휠체어에 앉히고 일으키며 우리는 ‘이동’이라는 복잡한 과정을 수행해야 했다. ‘이동’ 중에 친구의 다리는 끔찍스럽게 고통스러운 발작을 자주 일으키는데, 그럴 때는 환부를 꼭 누르며 떨림이 멈출 때까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고 말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친구는 피부를 따라 광범위하게 확산된 신경통을 앓지만 이런 통증을 이해하는 의사는 하나도 없다. 친구 말로는 피부가 쭈글쭈글 구겨져서 불타는 비닐랩이 된 기분이란다. 친구가 통증을 설명하는 동안 우리는 같이 그녀의 피부를 들여다본다. 
104. 통증을 대신 느끼지는 못하지만 나도 모르게 친구를 아프게 할 때면 내 몸 어디가 아픈 듯 움찔하고 또 실제로도 아픔을 느낀다. 지쳐서 기력을 다하면 휠체어에 앉은 친구의 무릎을 베고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네가 이렇게 아파하니까 정말 속상하다고, 아픔을 보고 상상할지언정 끝내 알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러면 친구는 말한다. 나 말고 누군가 이 아픔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너야. (그리고 J, 그녀의 연인도 있다) 무한히 너그러운 말이다. 나는 친구의 고통에 이토록 가까이 다가간다는 게 대단한 특혜로 느껴졌다. 아픔이란 본질적으로 우리가 대체로 피하려 애쓰는 무엇일 텐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 친구가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베푸는 사람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내 눈에는 감히 따를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로 보인다. 

페플바흐의 노랗고 긴 3층 집, 삐걱대는 싸구려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 침실에는 가로등 쪽으로 창이 뚫려 있었고(어떤 멍청한 자가 그렇게 설계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때문에 매일 밤 웬만한 커튼으로는 가려지지 않는 어마무시한 오렌지 빛이 방을 가득 채우곤 했다. 나는 그 빛에, 그리고 목적 없이 타지를 떠돈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종종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알렉스처럼 눈을 홉뜨고 오렌지색 천장을 바라보곤 했다. 오렌지 빛 불안감은 마음 한구석의 수도꼭지에서 콸콸 쏟아져나와 가슴을 채웠다.

딱 그런 순간을 지새우던 어느 겨울 밤이다. 서머타임이 지난 지 한참이 지나 한국시간으론 한창 잠에 빠져 있어야 할 친구에게서 때아닌 연락이 왔다. 터콰이즈 빛 지중해와 검푸른 흑해, 토블론 초콜릿의 모티브가 된 산맥과 티베트 고승들이 수양하는 히말라야의 사찰 지붕들 너머 그 외딴 섬과 진배없는 반도로부터, ‘우울하다.’ 라는 메시지가 날아온 것이다.

그 메시지를 확인하는 즉시, 나는 그녀를 위해 어떤 것도 해줄 수 없음을 알았다. 그녀 또한, 그 점을 알기에 그녀가 아는 사람 가운데 가장 먼 곳에서 혼자 웅크린 자에게 괴로움을 토로했으리라. 한편으로 고맙기도 했다.
 
취미를 찾아봐. 산책을 하고 풍경을 감상해봐. 집에만 있지 말고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봐. 이런 이야기는 그녀에게 얼음으로 만든 송곳이나 다를 바 없을 테다. 찌른 사람도 없이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전화가 와서, 나는 퀭한 눈가를 어루만지며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면서 곰곰이 그녀의 아픔을 곱씹어 보았다. 시즈널 블루. 오렌지 빛 가로등 너머로 새파랗게 동이 트고 있다.

미연아. 이름을 부르고 나는 문득 새파란 여름을 떠올렸다. 여름이, 여름 속의 블루가 건네는 일시적인 기쁨을.
 
그녀가 잠 못 이루는 부산, 여름이 오면 부산의 바닷가는 어디든 피서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룰 테다. 그들은 짧고 화려한 옷차림으로 부산을 누비며 저들끼리 무어라고 떠들어 댈 것이다. 그것은 곧 여름의 ‘축제 분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다소간에 미연도 그 분위기에 동화될 테다. 바다는 사파이어나 아쿠아마린, 라피스 라줄리의 반사광으로 찬란하게 일렁이고 있을 테고, 나는 그녀를 이끌고 영도, 해운대, 광안리를 다니며 저마다 미묘하게 다른 그 바다색에 대해 떠들 수도 있겠지.
 
그때까지 그녀가 나를 기다려줄 수 있다면. 여름까지만 살아내 줄 수 있다면.
 
나는 조급하게 입을 열었다. 

미연아. 여름이 오면... 나아질지도 몰라. 나는 그랬어. 겨울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침대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어. 사람들이 인생의 어떤 부분에서 고소하고 달콤하고 파삭한 느낌을 받는지, 그 느낌을 다시 받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사는 걸 단순히 멈추고 싶었어. 그게 아니라면 쉬고 싶었어. 사고를 할 수 없는 코스믹 베이지 속에 잠기고 싶었어. 해는 짧고 하늘은 칙칙하고 나무들은 앙상하지. 너무 추워서 샤워를 결심하는 데에만 삼십 분이 걸리지. 우리뿐 아니라 모두가, 들꽃과 과일을 빼앗긴 채 움츠러들어 이 계절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겨울을 탓하고자 함은 아니지만, 그것이 정확히는 내 우울감의 원인도, 그녀의 우울감의 원인도 아님을 알지만, 되는대로 말을 이었다. 해가 짧은 나라나 기온이 낮고 채광이 적은 지역의 높은 자살율 따위를 근거로 내 주장의 모서리를 말랑말랑하게 만들면서. 그게 내 친구를 피 흘리게 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그때 나하고 바다도 가보고 등산도 하자. 그때 기억하니? 해변에 텐트 치고 코펠에 라면도 끓여 먹고 바다 수영하기로 했으면서, 둘 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만사가 귀찮아져서 결국엔 가지 않았지. 하지만 이번엔 꼭 가보자. 여름에 나하고 놀아주렴. 

내 절절한 부탁은 어쨌든 파란색이다. 우리는 둘 다 우리가 그리하지 않을 것임을, 해변에 텐트를 치고 소금기 도는 바다에서 수영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둘 다 여름이, 그 푸른 바다와 탁한 빈티지 블루의 하늘이 기다릴 가치가 있는 것임을 막연하게나마 알았다. 무심한 오렌지빛 난로와 가로등 빛에서 피어오르는 겨울의 막막함을 견뎌서라도 만나야만 하는 찬란한 것임을 알았다.

일생에 여름을, 그 눈부신 블루를 다시 볼 수 없다고 가정해본다. 아르바이트와 공부와 애인과의 다툼과 시험의 수풀을 헤치고 한숨 돌리는 사이 무심하게 지나쳐버린 지난 여름이, 나와 그녀의 마지막 여름이라면. 뙤약볕 아래 빛나는 그 블루를 등지고 ‘사는 것을 쉰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두려운 일이다.
 
두려움은 가장 강력한 마케팅 수단이라는 점을 무기 삼아 재빨리 그녀를 밧줄로 묶었다. 그리고 따개비가 덕지덕지 자라나고 녹슬어 거칠게 표면이 들고 일어난, 때로 그녀를 깊게 베는 삶에 그 밧줄을 매어두었다. 그 삶은 잔인하게도 종종, 일 년에 3달 정도는 푸른 빛이다.
 
암소처럼 큰 눈을 도록도록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친구의 낯이 눈에 선하다. 하굣길, 아이스크림이나 피자타임 같은 간식거리를 물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나누곤 하던 그녀가 단숨에 자라나 사회로 첨벙 빠져버리더니만, 금세 죽고 싶어 한다. 파랑에게 이별을 고하려 한다.
 
물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가 내 목을 조른다. 정적이 흐른다. 

날 떠나지 마. 미안해. 날 위해 여름까지만 기다려줘. 내가 구태여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바닥에 몸을 던져 내 곁에 남아줄 것을 구걸하지 않아도 그녀는 그래보겠다고 했다. 그것이 못내 기껍고 달콤했다.
 
그녀가 사라진다면 내 팔레트에 짜서 굳힌 모든 파랑은 아니더라도, 분명 울트라마린만큼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 이름과, 빛깔과, 기억과 함께. 영문 모를 오렌지가 빈자리를 채울 것이다. 잠 못 이룰 것이다.

전화가 끊어진 후 창밖은 가로등 불빛이 꺼지고 아침 햇살이 완연했다. 고택과 교회 첨탑, 마치 수입 버터쿠키의 틴케이스에 프린트된 이미지처럼 고즈넉한 마을 풍경 너머 아침 하늘이 맑았다.   

블루엣 (매기 넬슨 저)
217. “심장이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 받기 마련이다.” “죽지만 않으면 시련으로 강해진다.” “슬픔은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교훈을 준다.” 중상을 입은 내 친구는 이런 부류의 경구들에 무섭게 분노한다. 물론 전신마비 환자가 될 사람에게 꼭 맞는 영적 교훈이라는 게 쉽게 생각나는 건 아니다. 종교나 유사종교가 있는 친지나 제 삼자가 흘린 “다 이유가 있을 거야.”라는 식의 뜨뜻미지근한 생각또한 그녀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다.
218. 그녀를 지켜본 목격자로서 나는 어떤 이유도, 어떤 교훈도 간증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말만은 할 수 있다. 지켜보고, 함께 앉아 있어 주고, 돕고, 함께 울고, 만져주고,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그녀 영혼의 찬란한 중심을 보았다고. 정확히 어떤 모양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 보았다는 말은 할 수 있다. 

 한 해가 흐른 뒤, 나는 그녀와 서핑을 했다. 약속한 바다 캠핑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것이 우리의 약속과 일정 부분 흡사한 점이 있다고 믿으며 내심 들떴다.

일광 바닷가는 인근에 위치한 원자력 발전소 때문인지 부산의 다른 어떤 해변보다 맑고 한산했다. 모래사장에서 빠져나와 샌들 사이에 낀 모래들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걷다 보면 해변을 따라 서핑보드 대여점들이 즐비했는데, 그중 몇몇은 예약제로 운영하는 서핑 클래스도 함께 진행하고 있었다.우리가 예약한 서핑 클래스의 강사는 상당히 무례했으나, 나는 점잖은 채도의 프러시안 블루 속에서 소금물을 한 바가지씩 들이마시느라 그의 태도에 불쾌감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보다도, 나는 서핑을 취미로 삼았다는 미연의 모습을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없는 시간 동안 종종 서핑을 해왔다는 그녀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나는 목청 큰 강사의 조언에도 꼴사납게 서핑보드에서 미끄러졌다. 그의 고함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나는 해변의 축축한 모래 위에 반쯤 드러누웠다. 그때 미연의 차례가 왔다.
 
그녀는 수평선의 경계에서 꼿꼿이 섰다. 때마침 높은 파도가 그녀의 서핑보드를 밀었다. 그러자 미연은 위풍당당한 자세로 중심을 잡고 양팔을 허공에 뻗었다. 나는 미연의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자알 했어!’하는 강사의 목소리가 멀찍이서 들려왔다.
 
바닷물에 젖은 그녀의 머리칼은 관자놀이와 미간에 전부 달라붙어 있었고, 추위에 다소 창백해진 뺨과 이마는 해안가 가을 햇살에 번뜩였다. 그녀의 홍채는 햇살 아래 물 적신 래브라도라이트 빛으로 어룽져서는, 표정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평온했다.
 
흰 포말을 가르고 살라키아처럼 부드럽게 내게 다가왔다.

알로라 라이츄 같아. 후에 나는 깜찍하고도 사랑스런 그녀의 서핑 자세를 그림으로 남겼다. 그 후로 파란 파도 끝 포플린 드레스 자락 모양으로 부서지는 포말과 마주할 때면, 그 극명한 색의 대비를 감상할 때면 자못 엄숙한 얼굴로 그녀의 표정을 떠올리곤 한다.
 
내 애걸에 못이겨 겨울을 이겨낸 후, 파도를 가르고 내게 미끄러져 오는 서핑의 여신을. 매기 넬슨이 에세이 한 권에 걸쳐 블루를, 그녀의 전 애인의 팔에서 꿈틀대던 네이비 블루빛 뱀 문신을, 블루와 얽힌 모든 공상과 순간들을 곱씹고 도살하고 쥐어짜고 끌어안듯. 나 또한 오션 블루를 보며 그녀를 떠올린다.

 삶을 잠시나마 쉬고 싶은 파도 앞에서, 양팔을 뻗은 채 부드럽게 그를 타고 넘는 그녀를.

블루엣 (매기 넬슨 저)
219. 마찬가지로, 그것을 보고 나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말도 할 수 있다. 정확히 무엇을 믿는지, 무엇의 존재를 믿는다는 건지 말할 수는 없으나, 나는 믿게 되었다. 
220. “우리의 근본적 상황은 기쁨에 차 있다.”라고 누군가 말하는 상상을 하라. 마치 그 말이 사실인 것처럼. 
171. ‘농밀한 파란색 조각들’을 줍기 시작할 때는 그 조각들이 떨어져 나온 온전한 파랑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꽃다발은 꽃나무 덤불에 바치는 헌사가 될 수 없다. 수년에 걸쳐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파란 돌멩이, 파란 유리조각, 파란 자갈돌, 인도에서 떨어져나온 짓밟힌 파란 사진들, 무너진 건물에서 나온 파란색 잔해를 산더미처럼 모아 쌓아두었고, 대부분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지만 여전히 사랑한다. 
204. 최근 들어 나는 하루의 넉넉히 절반 정도는 파란 부적 수집품들을 햇빛이 쏟아지는 선반에 올려놓고, 그로부터 “만물은 근본적으로 유한하다” 라는 교훈을 터득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일부러 그런 곳을 골라 진열해두었다. 파란 유리, 파란 잉크병, 투명한 파란 돌을 햇빛이 관통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기 때문이다.

무슨 색을 좋아해?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면 도통 들을 일이 없는 질문이다.

그게 현실적으로 우리 삶과 큰 연관도 없거니와, 남이 제일 좋아하는 색을 알아서 도움될 일도 없으며, 정말이지 이젠 딱히 관심도 없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루가 아니더라도 골목을 걷다 어떤 선명한 색채와 쾅 하고 부딪힐 때에, 그 채도처럼 선명한 감상과 마주한 일이 정말이지 없을까? 색채로 인해 위로를 받은 적이, 상처를 받은 적이, 살의를 느낀 적이, 소외감을 느낀 적이, 사랑을 느낀 적이 정말이지 없을까? 

 장담하건대, 길바닥에 버려진 버밀리온 빛 전단지나 농지에 널부러진 기가 막히게 파란 방수포 따위를 들여다보면, 으레 물밀듯 밀려드는 날 것 그대로의 기억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맘때쯤 1008번을 타게 된다면, 로터리를 돌 때에 푸른 꽃 군락을 눈여겨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꽃의 이름을 알고 있다면, 바라건대 옆자리에 앉은 이에게 귀띔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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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타임스Live 2024-05-29 21:55:19
이선엽님 소중한 의견 감사드립니다

이선엽 2024-05-28 23:45:52
정말 매력적인 책인 것 같네요!
블루 저도 참 좋아하는 색이랍니다
좋은 책 추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잘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