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뉴스
[책 읽기와 살아내기]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상태바
[책 읽기와 살아내기]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 송지현 기자
  • 송고시각 2024.05.18 01:51
  • 댓글 0
  • 유튜브
  • 카카오스토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별안간 내 삶을 무너뜨리는 절망 앞에서 의연한 나일 수 있다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책 표지. 출처:교보문고

 

"그 얼룩고양이 있잖니, 뺨에 점이 있는."
"으응."                                                                       
"걔가 새끼를 가졌어. 아유 어떡하니."
"왜? 난 새끼 고양이 좋은데."
"나는 싫다. 너무 속상해."
 
길고양이의 습성과 생애를 모르던 20대 초반, 엄마의 탄식에 의아하여 천진난만하게 묻던 기억이 난다. 엄마와 나란히 서 유리창 너머를 쏘아본다. 아버지가 뜬금없이 가져다 놓은 골칫덩이 '손하트 하는 돌하르방'에 구멍을 더 내고야 말겠다는 듯.                              

죽음을 빈번히 목격하는 직업을 지닌 노동자들은 필연적으로 죽음과 가까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소방청에 따르면 소방공무원 40% 이상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수면장애와 같은 정신질환으로 고통받으며, 이 가운데 4.9%는 자살 고위험군이다. 또한 2017~2021년 사이 자살을 선택한 소방공무원은 67명에 달한다. 
 
또한, 넘쳐나는 유기 동물들을 직간접적으로 안락사 시켜야만 하는 동물보호시설의 관리자나 수의사 역시 죄책감과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기사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 같은 노동자들을 짓누르는 열악한 노동환경과 가혹한 업무강도를 차치하더라도, 죽음과 같은 거대한 불행을 가까이서 접한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건강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인간이 생에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참혹한 이별의 순간을 노상 마주하다 보면 길을 걷듯 일상을 살아내다가도 수습할 수 없이 망가져 버린 자신을 마주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가령, 불행이 찾아와도 크게 낙심하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로써 행복에 대해 비현실적으로 높은 역치를 갖게 된다거나, 고요한 휴식 시간을 만끽하다가도 태풍의 눈에 도달한 듯 완연한 평온을 누릴 자격을 박탈당했다는 느낌을 받는 식이다.

대개는 시커먼 물 속으로 가라앉듯이, 커다랗고 팽팽한 고무풍선을 삼킨 듯이 헐떡거리며 어느 날 밤을 지새운 뒤, 차게 식은 손으로 집 근처의 정신건강의학원을 검색해보는 것을 시작으로 문제를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또 언제쯤이나 한 인간은 갑작스런 절망 앞에 무던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일이 꽤나 자주 목격된다면, 그것을 계속해서 갑작스럽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어째서 우리는 매번 익숙해지지 않고 까무라치며 괴로워하는가? 

참혹한 죽음을 목격하고 그 적나라한 유해와 흔적을 수습하며 내게, 책에게, 타인에게 수없이 물어왔다. 익숙해지고 무뎌진다라,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아마도 그는 사랑하기를 멈춘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다시 말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오랜 세월 체념한 체 갈망하던 그 해답.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윤슬을 일으키고 찰랑이는 검은 고통을 단물이 빠지지 않는 과일 껌처럼 씹으며 살아내다가 별안간 독서 모임에 들었다.

그리고 유난히 예민하고도 변덕스런 사내에게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을 추천받아 읽기 시작했다.

책에서 이 같은 상황과 고통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잔혹하고도 무정하다. 그럼에도 나는 꾹꾹 눌러 필사하며 읽어냈다.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고, 자동문 너머 도서관 휴게실에서 어스름이 내린 창 밖 풍경을 응시하며 씩씩거리기도 했다. 아무튼 심호흡이 끝나면 비굴하게 자리로 기어들어가 다시 읽고, 다시 걸어나와 콧김을 뿜어대고, 대략 그런 식의 독서였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저) 127p
···그러면 나쁜 나날을 보내고 있으면 어떻게 하라는 걸까? 데이비드는 나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동정심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절망의 철학>의 최종 결론은 절망이 선택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절망이 청소년기에 자연스럽게 거쳐 가는 단계라고 생각하기는 해도 그런 감정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멸한다. 그는 그런 사람들은 "축 늘어진 정신의 유행"을 따르고, 문학 속 "슬픈 왕들"을 흉내 내는 게으른 모방자들이며, 그들이 "지옥불 같은" 숨결을 내뿜는다고 비난한다. 죽음의 냄새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그 모든 것의 허망함을 곱씹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몹쓸 짓인 이유는 진화가 선물한 그 소중한 전기를, 너무나 많은 경이로운 감각들을 느끼고 너무나 많은 과학적 수수께끼를 푸는 데 써야 할 그 신성한 이온들을 실존적 탐구라는 하수구로 흘려보냄으로써 글자 그대로 "몸이 아직 살아있는데도 죽은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익숙한 수치심이 나를 덮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버지가 엄청 차가운 호수에 풍덩 뛰어들었다가 개구쟁이같은 미소를 만면에 띠고 큰 숨을 내쉬며 수면으로 치솟는 모습을 볼 때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이었다. 

죄송합니다. 손만 씻고 바로 주문 도와드릴게요. 흙과 모래가 개수대에서 소용돌이 모양으로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캬라멜 마끼아토 아이스로 두잔, 가져가시죠? 바로 준비해드릴게요." 

유리창 너머로는 이미 해가 넘어간 지 한참, 어느새 하늘은 붉은 기 하나 없이 우유 탄 암청이다. 허겁지겁 마당을 가로질러 달려오느라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할 새도 없이, 불쑥 내밀어진 카드를 받아들며 생긋 웃어 보였다. 겨울바람에 뺨을 타고 흐른 물줄기가 마르며 피부가 당겨왔다. 나는 손님의 카드에 물기가 묻어있지 않길 바라며 커피 그라인더 버튼을 눌렀다. 콰아아. 
 
뒷마당에 내가 판 구덩이의 지름은 턱없이 모자랐다. 나에게 있어 너는 아직 아기였었나보다. 삽을 내려놓고는 혼자 기가 차서 헛웃음을 쳤다. 보따리에는 가장 커다란 들꽃만을 모아 만든 소박한 꽃다발과 간식, 챠카챠카 소리가 나는 장난감이 들어갔다. 

보따리 메고 조금만 방랑하다 돌아오거라.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저) 128p
나는 왜 아버지처럼 저렇게 살 수 없는 걸까?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게 뭘까? 그 답을 찾으려는 필사적인 마음에 나는 계속 책을 읽으며, 위생과 유머, 외교, 평화주의에 관한 그의 비판문과 시, 강의 노트, 알코올과 립스틱과 전쟁에 관한 논쟁을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오후 나는 발견했다. 공포에 대한 해독제, 희망에 대한 처방을 말이다. ··· 특별한 활자체로 된 여덟 개의 단어.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나는 경악했다. 이거였다. 내 아버지가 즐겨쓰는 그 비법. 오늘날까지도 아버지 책상 위 액자 속에 담겨있는 바로 그 단어들. 다윈이 외친 투쟁의 권유. 내 아버지와는 다르게-반항적이고, 희망과 신념이 가득한 사람으로-보였던 데이비드지만, 결국 그에게도 내게 알려줄 새로운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늘 들어왔던 말을 또다시 상기시키는 것밖에는.
장엄함은 존재해. 네가 그걸 보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 

어쩌면 나는 뺨을 후려치듯 매서운 일갈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슈가도넛같은 우리 백구와의 이별, 그리고 일을 하며 마주한 수많은 죽음 앞에 혼절하고 비명을 지르고 아기처럼 울음을 터뜨리던 나는 불행이 극에 달한 어느 오후 주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영영 그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고 나를 설득시켜 줄 만한 글귀나 사진을, 실화나 인터뷰를 알고 있다면 부디 내게 보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건네온 위로와 시, 유명한 인용구는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과 별개로 도무지 와닿지가 않았다.

대개는 오로지 위로를 목적으로 한 글귀에 지나지 않을 뿐, 나로 하여금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며 어디선가 그들이 멀쩡히 뛰놀거라 믿게 하는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지하철 앞에서 나누어주는 교회 물티슈에 쓰인 복음 구절과 천국 예찬을 읽었을 때처럼, 나는 아득한 거리감과 외로움만을 느낄 뿐이었다. 종교도 나를 설득하고 구원하지 못하는데 일에 찌든 주변인들을 괴롭혀가며 대관절 나는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하고 자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로 몇 년이 지난 초봄의 오후, '나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덮으며 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책은 끝까지 내 상처 위에 흰 천을 덮어주지도, 조심스런 손길로 연고를 발라주지도 않았으며, 우리의 생은 본디부터 괴롭고 갑작스럽고 아프고 끔찍한 놀라움으로 가득찬, 똘똘 뭉친 철조망 뭉치같은 거라는 듯 내게 현실을 씹어뱉었다.

동시에 그럼에도 살아내는 것. 생명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세상, 그곳에서 역경 앞에 무너지고 깨어지고 박살나면서도 끊임없이 다시 사랑하고 묵묵히 털고 일어나 생을 이어가는 것이 바로 진정한 투쟁이라 말한다.

딱딱하고 써늘한 금샘도서관 의자 위, 구부정한 자세로 책을 쥐고 앉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을 즈음 그 무정한 해답을 마주하고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안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심호흡과 필사가 끝난 다음에는, 대리석 같이 반지르르하고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그것은 결코 검지 않았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저) 130p
"한 사람을 계속 나아가도록 몰아대는 건 뭘까?"
 그때 그 친구가 한 말은 '흠'이 다여서 나는 맥이 좀 빠졌지만, 다음 날 오후 이메일을 통해 좀 더 긴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네가 말한 그 이야기 말이야.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정교한 뭔가를 쌓아 올렸다가... 그 모든 게 다 무너지는 걸 목격한 그 사람... 그 사람은 계속 나아갈 의지를 어디서 다시 찾았을까 하는 그 질문. 계속 가고 싶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계속 가게 만드는 모든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그것을 카프카는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고 불렀어. 파괴되지 않는 것은 낙관주의와는 전혀 무관해. 낙관주의에 비하면 훨씬 더 심오하고 자의식은 훨씬 덜하지. 우리는 그 파괴되지 않는 것을 온갖 종류의 다른 상징과 희망과 야심 등으로 가리고 있어. 이런 상징과 희망과 야심은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 인정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니까. 음... 만약 그 모든 잉여를 제거한다면(혹은 제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면), 파괴되지 않는 그것을 찾게 될 거야. 그리고 우리가 일단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카프카는 여기서 더 깊게 들어가. 그는 우리가 파괴되지 않는 것을 낙관적이거나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해주지 않아.), 그것은 실제로 우리를 찢어발기고 파괴할 수도 있어.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거지...’

"엄마, 고양이 밥 놓지 말라니까."
 지상의 모든 자원과 공간이 응당 인간이 독점해 마땅할 재산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이처럼, 튿어진 쓰레기 봉투나 분변 따위에 거품을 물고자 함은 아니었다. 더욱이 새똥을 갈길 때를 제외하고는 관심도 없던 새의 목숨을 핑계 삼아 고양이 밥그릇 따위에 심술을 부리며 핏대를 세우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노력 없이 채워지는 밥그릇 앞에 마당 고양이들은 햇볕 아래 배를 드러내고 뒹굴 뿐이다. 엄마 마음 아픈 거 싫다. 단지 그 한 마디가 못내 민망하고 껄끄러웠던 것이다. 괜히 쾅, 소리가 나게 커피 찌꺼기를 털어낸다.                                     
     
배곯는 것을 먹인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살이 통실하니 오르고 곁에 와 치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존재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이별할 것이 두려워 사랑하기를 망설이지 말라, 세상에 그리도 무심한 말이 있을까? 그 말을 처음 한 이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두 손으로 자신보다 어린 생명의 무덤을 파 본 적은 없을 것이다 하고 이를 깍 깨물던 어느 해질녘을 회상한다.
 
내 말을 못들은 척 쇠그릇에 참치 캔을 덜어내는 엄마의 옆얼굴은 무색이다. 그녀는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절망 앞에 전적으로 무심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찍이 알고 있었던 탓이다.

동시에 나는 그녀가 주어진 삶에서 그 장엄함 앞에 투명한 유리잔을 내밀고, 콸콸 쏟아지는 독배를 받아 지체없이 들이키고, 몸서리를 치고 켁켁 기침을 하면서도 사랑하고 살아낼 것임을 안다. 척척 억센 발걸음으로 나아갈 것임을 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저) 133p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보다 더 위대하다. 이 얼마나 경이롭고 분발을 요구하는 투쟁의 권유인가.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위로이자, 어깨를 움켜쥐는 손길인가. 그런데 작은 문제가 하나 있다. 그가 쓴 단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신도 그 문제를 발견할 것이다. 그 진주알을 만든 최초의 작은 모래알 하나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이 말은 그가 자기 자신에게 결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바로 그런 종류의 거짓말이다. 사악함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그가 경고했던 그런 종류의 거짓말. 자기 경력을 바쳐 맞서 싸워야 했던 그런 종류의 거짓말이자, 그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가치가 있다고 말했던 그런 종류의 거짓말이다. 자연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으니까! 그조차도 절망에 완전히 집어삼켜지지 않으려면 그 거짓말이 진실이기만을 믿어야 했던 것이다. 
253p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클로버와 민들레가 소담하니 피어난 마당에서 잠시 에어컨 바람을 피했다. 뙤약볕 아래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있으니 무릎이 아파와서, 자리에서 일어나 기우뚱 기우뚱 스트레칭을 한다. 곧장 정강이에 엉겨오는 걸 밀어내고, 이내 피크타임을 감당하러 실내로 발길을 돌린다. 왜옹. 어딜가냐 묻는 의문문이 등 뒤에서 나직이 들려온다. 
 
엄마는 하루 세번 뻣뻣하게 마른 수건으로 유리문을 억척스레 닦곤 하신다. 어찌나 깨끗이 닦으시는지, 한 번은 손님이 유리문의 존재조차 모른 채 굉음과 함께 유리문에 장렬히 부딪힌 적도 있다. 그분이 든 쟁반 위 음료 4잔은 시원하게 바닥과 유리문을 물들였었다. 내가 빌딩 유리에 머리를 박는 까마귀를 떠올리며 문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댈 즈음엔 우윳빛으로 반사된 그 문 위로 오전 중에 남은 얼룩들이 설핏 보인다. 발목 높이 쯤, 아침에 참치 먹이를 기대하며 모인 이웃들의 촉촉한 코도장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위, 그들을 만나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온 어린아이들이 남긴 밀감 만한 손도장들.

"돌돌이 어딨어?"                                                                                                                                                     
유리문을 밀고 커피내음 쌉쌀한 카페로 들어서며 묻는다. '돌돌이'로 바짓단과 소매에 묻은 희고 검은 털을 떼어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