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유림의 활동] 5) 이현사(二贒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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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유림의 활동] 5) 이현사(二贒祠)
  • 기장향교
  • 송고시각 2020.10.21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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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씨를 벗삼아 음력 4월 첫날을 맞이하여 문묘(文廟)에 분향(焚香)의 예를 올린 후 기장의 유서깊은 명문가인 월성 김씨문중(月城 慶州金氏) 의 사당인 이현사( 二贒祠)를 찾았다.
이현사(二贒祠)는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 산막마을 안쪽 산기슭에 있다.
예전에는 마을에서 떨어져 있어 보였으나 지금은 주위의 환경이 공단과 상업시설 등이 입주한 탓에 조심스레 사당 을 찾아야 될 정도로 금방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현사는 운서 김윤룡(雲瑞 金潤龍)公과 오정 김방한(鰲亭 金邦翰)공 두 분의 신위를 모셔 제사(祭祀)하고 있다.
김윤룡 공의 자는 운서(雲瑞)이며 호는 도정(陶亭)이다. 본관(本貫)은 월성(月城=慶州)이고 신라 경순왕 27대 손(新羅敬順王二十七代孫)이며 임란시 다대포  군절제 사겸 부산진관(壬辰倭亂時多大浦軍節制使兼釜山鎭管 )을 맡아 많은 공을 세우시기도 했다.
임란후 선무원종공신 정이등에 훈록(壬亂後宣武原從功臣正二等勳錄) 되셨으며 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 사(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를 추증받으셨다.
김윤룡 공의 묘소는 정관면 병산리 박달산(朴達山)에  있다.
김방한공의 자는 공점(公漸), 호는 오정(鰲亭)이며 숙종 2년에 사마시에 입격(肅宗二年司馬試에入格)하였으 나 향리에 은거하시어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몰두하셨다.
공은 숙종14년 1675년 주역언해(周易諺解) 3권을 지어 나라에 올렸으며 이 때 숙종임금은 공에게 비답(批答)을 내렸다 한다.
한편 임란 후 기장현이 선조32년에 폐지된 후 18년 만에복현될 때 상북면, 중북면, 하북면 3면이 포함되지 않아 이를 안타까이 여겨 효종4년 1653년에 강유후(姜裕後) 현감이 기장현감으로 계실 때 상소문(上疏文)을 올렸는 데 이 때 이 상소문(=乞下未面還屬疏)을 오정공이 적고 강유후(姜裕後) 현감이 올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상소문은 원문이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학교규장각(上疏文原文國立中央圖書館 서울大學校奎章閣)에  보존되어 있다.
김방한공의 대단한 문장력과 문필가(文章力 文筆家)로 서의 흔적을 알 수 있다.
해마다 우리 기장에는 차성문화제(車城文化祭)가 10월 상달에 행해지고 있으며 이 축제 기간 중 울산군에 복속된 기장의 땅을 찾기 위해 상소를 올렸던 360여 년전 오정공을 그리워하며 그 시대적 상황을 한 편의 단막극(單幕劇) 으로 재현하고 있으며 그 상소문을 불초 제가 2년 동안 감히 오정 선생이 되어 상소를 올리는 영광도 누렸다.
1646년(병술년) 기장향교 향안(鄕案)에는 종한(宗翰), 지한(之翰), 동한(東翰, 방한(邦翰) 네 형제분이 등재되 어 있다. 이 때 오정공의 년(年)이 11세 이셨다.
우리 기장에 이렇게 많은 훌륭한 선대들이 계신다는 게 참으로 자랑이 아닐 수 없슴에  새삼 돈수재배(頓首再拜)의 예가 저절로 생겨남은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니겠는가?
이현사 경임록(二賢祠經任錄)에는 1980년 경신년에 김기오(金琦五) 유림이 단장으로 시작하여 1981년 신재화(辛在華)단장. 안영표(故 安榮杓 機張鄕校原任典校)향유사(鄕有司) 등의 유림들이 지금껏  대를 이어 향사(享祀)하며 선대를 모심에 인색해 하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기장향교 향안, 기장향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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